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란다우 (문단 편집) === 석방 및 소련의 핵개발 참가 === 1939년 4월, 란다우는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이 혐의는 그의 사후인 1990년에야 공식적으로 증거부족으로 종결되었다. 훗날 두 달만 늦었어도 자신은 옥사했을 것이라고 혹독한 감방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어 연구소에서도 복직하고, 1946년에는 소련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소련은 맨하탄 계획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고르 쿠르차토프를 총책임자로 앉혀 핵개발을 시작했다. 란다우도 [[소련의 핵개발]]에서 30대 소장과학자로서 참가, 이론적 계산에서 여러 돌파구를 뚫었고, 소련은 성공적으로 [[원폭]]과 [[수폭]]을 개발하게 된다. 이 공로로 [[대조국전쟁]] 이후 스탈린 훈장도 받았고, 스탈린 사후에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46년 여친 콩코르디아가 [[혼전임신|임신하자 결혼했다]]. 1955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0년대 수많은 연구업적을 내는 한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일련의 과학자들과 함께 소련 지도부에 보내는 편지를 보내 사이비 진화이론으로 소련의 농업을 말아먹은 [[트로핌 리셴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업은 리셴코의 영향력은 1960년 중반까지도 계속된다) 1950년대, 40대 중반에 그는 이미 소련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소련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 대가들이 많았지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은 그의 동년배 과학자들인 이고르 탐, 일리야 프랑크,파벨 체렌코프가 [[체렌코프 현상]]으로 1958년 최초로 수상하였다. 당시는 핵물리학이 물리학계의 대세였기 때문에, 핵물리학자들인 이들이 먼저 수상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